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문단 편집) === 2~4차 아메리카 원정, 원주민 탄압 및 학살 === 1493년에 시작한 2차 원정에서부터 콜럼버스의 탐욕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1차 원정에서는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보낸 기록을 보면 원주민들을 우호적이고 영리하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2차 원정 때부터는 멍청하고 폭력적인 야만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반면 타이노인들은 처음 만난 콜럼버스 일행을 굉장히 잘 대접해 주었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선의의 표시로 내어 주었다. 콜럼버스조차도 "그들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데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매우 온유하고 악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살인이나 도둑질도 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세상에 이들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다고 믿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세상에서 가장 감미로운 말을 하며, 온유하고 항상 미소를 짓습니다"라며 이들을 극찬할 정도였다.] 우선 그는 1차 원정에서 돌아올 때 선원 30명 가량을 히스파니올라 섬에 남겨두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이사벨라 여왕에게 이번 원정에서는 엄청난 수의 '''노예와 금'''을 얻을 수 있다며 1차 원정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원조를 받아낸다.[* 1차 원정 때의 선박 수는 도합 4척이 전부였으나, 2차 원정 때는 17척으로 원정을 시작했다. 선원들은 1차, 2차 모두 사면을 미끼로 범법자를 선원으로 모집하기는 했지만 2차는 전직 군인들도 모집함으로써 원주민을 족칠 전력을 모은다. 실제로 [[대포]]나 [[도검|칼]], [[갑옷]] 등 무기를 들고 갔다.] 이렇게 2차 원정이 시작되었지만,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에 세웠던 거점인 라 나비다드[* 아이티 북동쪽에 있었다.]로 돌아와 보니 일전에 남겨 놓은 30명가량의 선원들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증언할 당사자가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확실하게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후 콜럼버스 탐험대의 행보를 토대로 선원들이 한 사람당 최고 5명씩 원주민 여자를 거느린다거나 금을 비롯한 보물을 긁어모으기 위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심하게는 원주민을 죽이기까지 하는 행패를 부리다가 마침내 견디다 못한 원주민들이 반기를 들어 선원들을 몰살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으며, 이후 콜럼버스는 지금의 도미니카 공화국 북부[* 푸에르토플라타 주 소재.]에 여왕의 이름을 붙인 식민지 거점인 라 이사벨라를 세운 뒤, 호전적인 부족뿐 아니라 보통 원주민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전설에 따르면 한 마을에서는 '''700명 가량을 자비도 없이 모두 생포해 창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그 후로도 학살은 계속 이어졌다. 그 당시 원주민들은 철기가 없이 [[암석|돌]]로 만든 무기들을 가지고 싸웠으니 당연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저항하다가 붙잡힐 시 분살을 포함한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패배에 직면했을 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3차 원정(1498~1500)과 4차 원정(1502~1504) 때 콜럼버스 탐험대는 점점 더 잔인해져서, [[마스티프]]라고 하는 [[맹견]]을 데리고 와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14세 이상의 원주민들은 석 달마다 콜럼버스가 제시하는 금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시 손목이 잘리는 형벌을 받고 [[과다출혈]]로 죽어갔으며, 9살의 소녀부터 35세의 성인 여성들까지 강제로 은화 한두 닢에 [[매춘부]]로 만들었다. 콜럼버스가 오기 전까지 히스파니올라 인구는 30만 명이었으나 2년만에 10만 명이 죽고, 나중에는 500명밖에 남지 않다가 결국 원주민인 [[타이노인|타이노족]]은 전멸했고 혼혈 후예만 남았다. 그러자 콜럼버스와 스페인인은 처음에 원주민 노예들을 수출하다가, 나중에는 흑인 노예들을 수입해 왔다. 흑인 노예들도 원주민 노예들처럼 얼마 안 가긴 마찬가지였으나, 살아남은 흑인 후손들이 원주민 및 백인과 혼혈 자손을 남겨서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은 아프리카계 흑인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이 많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콜럼버스는 자기가 발견한 땅이 [[중국]]의 남서부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중국 황제 대칸이나[* 정확히 말하면 [[원나라]]의 황제인 [[쿠빌라이 칸]]의 후손에게 보낼 편지를 갖고 왔다. 당시 콜럼버스를 포함한 유럽인들은 13세기에 [[원나라]]를 탐방하고 온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동방견문록]]을 즐겨 읽었고, 그래서 아직도 중국을 [[몽골인|쿠빌라이 칸의 후손]]들이 다스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설의 황금 광산을 찾았지만 나올 턱이 없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73205&cid=820&categoryId=1944|관련 내용 1]], [[http://en.wikipedia.org/wiki/Black_legend|관련 내용 2]]. 보다 못한 다른 스페인 관리들이 본국에 콜럼버스의 만행을 알렸지만, 본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백인들은 원주민이나 [[흑인]]들은 인간으로 보지도 않았기 때문인데, 스페인에서 원주민들을 최소한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콜럼버스의 원정이 완전히 끝난 직후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라스 카사스]]와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면서였고, 흑인이 그 정도의 대접을 받으려면 그보다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했다는 시대적 한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콜럼버스는 본국에 자기가 정복한 땅의 총독 자리와 지도자 자리를 요청했으며, 해군 제독이라는 지위를 주장하면서 이것을 자식들에게 세습시켜 달라고까지 요구했다. 심지어 사업에서 얻은 이득의 1/10은 자신의 것으로 하겠다고 했다. 주는 것도 없이 얻어만 먹으려는 심보였으니 그야말로 [[버틸 수가 없다!|버틸 재간이 없었다]]. >"1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콜럼버스처럼 몰락하려면 대단한 [[무능]]과 [[오만]]이 필요한데, '''콜럼버스는 그 두 가지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 >[[빌 브라이슨]] 그 외에도 한 부하 선원이 섬을 발견했는데, 그를 협박해서 자기가 발견한 것으로 거짓 보고하는 등 남의 공을 가로채 부하들 중에서도 적이 많았다. 그리고 그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왔던 원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예]] 시장에 팔아넘긴 기록도 있다. 사실 콜럼버스가 저지른 짓은 당시 유럽 기준으로 봐도 아주 사악하다고 비난받은 행위였다. 아무리 당시 백인들이 타 인종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애초에 이런 말 자체도 비판적으로 들어야 한다. 당연히 현대적인 수준의 인종 평등의식이나 인권 의식이야 흔적도 없던 시대지만 아메리카 정복 이전 유럽인들이 타문명, 타인종과 교류 안하고 살았던 거 아니다. 애초에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나 라스카사스 같은 인물들이 동시대 스페인, 포르투갈 정복자들의 포악함을 비판한 논리가 '''유럽에서도 당장 종교나 인종이 다르다고 권리를 부정하고 때려 죽이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 유럽인이 아니라고 미주 원주민들을 마구 학살하거나 노예로 부려도 된다는 인간들은 이단적인 주장이다'''였을 만큼, 국제법이나 국제 교류의 큰 토대는 이미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진짜 유럽 사회 전반이 당시 기독교인, 유럽인 아니면 다 때려 죽여도 된다고 믿었던 게 아니라 콜롬버스 같은 당시 신대륙에서 원주민과 접촉을 주로 하던 정복자, 개척자들이 '''원래 동시대 유럽 사회 기준에서도 상상을 초월하게 폭력적이고 깡패스런 뱃사람들이라서''' 저런 [[유혈사태]]가 잦았다고 봐야한다.] 콜럼버스는 야만인(=원주민)과의 약속은 어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콜럼버스의 부하들조차 보다 못해 "제아무리 야만인이니 뭐니 해도 최소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하지 않느냐"며 크게 반발했고 심지어 일부는 그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기까지 했다. 어쨌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한 법이라, 당시 콜럼버스의 부하 중에는 원주민들과 친해져서 호형호제하는 사람도 많았고 원주민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얻은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 앞에서조차 원주민들을 대놓고 탄압했으니 좋게 볼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1504년 1월에는 일부 부하와 원주민들이 손잡고 콜럼버스를 암살하려 하기도 했는데, 그는 [[빤스런|자던 중 놀라서 속옷 차림으로 달아나]] 다른 스페인 주둔군이 있는 곳으로 피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그 꼴을 본 스페인 군인들조차 대놓고 비웃었을 정도였다. 그가 이렇게 원주민을 잔인하게 대한 이유는, 그의 항해가 수익성이 있음을 스페인 본국에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발견한 것은 중국이나 인도를 향하는 항로가 아니라 그냥 원주민들이 담배 피우는 신대륙이었다. 물론 이후에 신대륙에서 나오는 막대한 [[은]]과 [[기호품]]이 유럽 국가들의 재정을 책임지는 근간이 되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대 기준으로도 먼 후대의 이야기일 뿐이다. 콜럼버스가 당시 발견했던 신대륙은 그냥 외딴 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100% 이익이 난다고 호언장담했는데 결과는 1% 이윤만 나는 셈이니, 그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막대한 금을 수집한다. 하지만 그렇게 긁어모은 금조차 턱없이 적은 양이었고 그는 점점 더 잔인해지게 된다. 여하튼 이런 만행 때문에 콜럼버스는 당대부터 이미 크게 지탄받는 인물이었으며, 근현대에 반짝 콜럼버스에 대한 미화가 흥하게 되지만 이내 그의 추악한 민낯이 까발려지며 콜럼버스의 이름은 탐험가의 대명사가 아닌 피와 욕망에 굶주린 [[학살자]]의 상징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